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Great Pianists of the 20th Century) 33인 : 1편


1. Geza Anda(1921~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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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태생 스위스 피아니스트. 부다페스트 출생. 1942년 스위스로 망명하여 이후 취리히에 거주하면서 세계적으로 활동하였다. 부다페스트의 음악원에서 E. 도흐나니에게 사사하였으며, 졸업 후, J.W. 멩겔베르크·W. 푸르트벵글러 등의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여 주목을 끌었다. 바르토크의 해석과 연주에 정평이 있고, 시원하고 명쾌한 스타일을 특기로 하였다.



Fryderyk Chopin,  Waltz for piano No. 11 in G flat major, Op. 70/1, CT. 217

2. Martha Argerich(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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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헤리치는 5살때 처음으로 빈센초 스카라무자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굴다의 지도를 받았으며 니키타 마갈로프, 스테판 아쉬케나제로부터도 배웠다.
1957년 볼자노와 제네바의국제 콩쿨에서 우승했고 196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에서 우승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다. 아르헤리치는 19세기와 20세기의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비르투오조’ 작품의 스페셜리스트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베토벤, 슈만, 리스트, 드뷔시, 라벨을 거쳐 바르톡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특히 80년대 초반 이후 그녀의 프로그램에서 보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베토벤의 음악들이다.
아르헤리치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기돈 크레머의 록켄하우스 페스티벌 그리고 뮌헨 피아노 섬머 등지에서 연주를 해왔다. 1992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샤를르 뒤트와가 지휘하는 파리 국립 관현악단과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3번을 협연했으며 1992년 신년 이브 콘서트에서는 아바도, 베를린 필과 슈트라우스의 ‘부를레스케’를 연주했다. 1993년 8월에는 미샤마이스키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다.
아르헤리치와 도이치 그라모폰사와의 관계는 1967년부터 긴밀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그녀는 수많은 음반들을 녹음했는데 바흐, 브람스, 쇼팽, 리스트, 프로코피에프, 라벨 그리고 슈만등의 독주곡, 아바도와의 쇼팽, 리스트, 라벨,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뒤트와와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시노폴리와의 베토벤 협주곡,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슈만, 쇼팽 실내악곡, 미샤 마이스키와의 바흐 첼로 소나타 그리고 베토벤 첼로 소나타 등이 대표적인 음반들이다.
특히, 기돈 크레머와 함께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은 그녀의 주요 프로젝트중 하나다. 또한 그녀는 크레머와 더불어 슈만의 소나타, 바르톡, 야나첵, 메시앙 등의 작품과 함께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조인트 앨범인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와 멜로디는 1992년 ‘동경 레코드 아카데미’, ‘디아파종’, 1993년 ‘에디슨 어워드’를 수상했다.
Fryderyk Chopin,  Prelude for piano No. 16 in B flat minor, Op. 28/16, CT. 181

3. Claudio Arrau (1903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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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남미 칠레(Chile)의 산티아고(Santiago) 남쪽에 위치한 치얀(Chillan) 출신으로 파오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5세 때 산티아고에서 첫 무대를, 7세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데뷔하였다. 그 뒤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유학, 베를린의 슈테른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다시 M.크라우제에게 사사(1910∼1915)하여 기량을 닦았다. 1914년 11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도 데뷔하고 2년 후에 이바하상을 받아 피아노 독주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1924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활약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피아노 1등상을 받아 더 한층 명성을 떨쳤다.
그는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레퍼토리를 가졌으며 뛰어난 기교와 지적이고 개성적인 이해를 특기로 연주하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베토벤과 쇼팽 음악의 세계적인 해석가로 정평이 나있는 그가 우리나라를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주옥같은 음들을 들려준 바 있다. 그는 음악적 해석을 작곡자의 진정한 의도를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다가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연주자의 상상력을 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 작곡자의 뜻과 연주자의 개성이 밸런스 있게 조절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라고 보고, 악보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면서도 작곡자의 의도를 무책임하게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중남미의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가장 먼저 중남미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확립한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Johannes Brahms, Variations  on a Theme of Paganini, for piano, in A minor, Op. 35 Variation No.13[##_Jukebox|cfile27.uf@247626395871D6BB175A7B.mp3|03. Brahms- Paganini Variations Op. 35 Book 1 Variations 1|autoplay=0 visible=1|_##]

4. Vladimir Ashkenazy (19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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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색채감과 서정적 표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쉬케나지는 이 시대가 낳은 독특한 연주 품격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며, 역사적 격동기에 정치적 시련을 거치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켜온 금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구소련 고리키에서 태어나 6세때 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8세 때인 1945년 모스크바에서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데뷔, 그 천재성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5년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 2위, 56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1위로 일약 세계음악계의 주목을 받게된 아쉬케나지는 이를 계기로 58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데뷔, 크게 성공한후 1962년 콩쿠르의 최고봉인 제2회 차이코프스키국제콩쿠르 우승으로 또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콩쿠르 우승 직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고국을 떠날 결심을 하게된 아쉬케나지는 1969년 아이슬랜드로 망명, 세계음악계의 화제를 모으며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1975년 부터는 지휘에도 흥미를 가져 그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비롯, 로열필하모닉, 보스톤심포니,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런던심포니등 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오고있으며, 1987년 런던의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최고점에 다르게된다. 현재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서 "어떤 격식에 사로잡히지않은 순수한 천재성의 해석력을 가진 지휘자"라는 평을 듣고있다.
아쉬케나지는 연 100회 이상 정열적인 연주활동과, DECCA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활동을 하고있으며, 이차크 펄만, 린 해럴과 파트너를 이루어 챔버뮤지션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9년에는 조국을 등진지 26년 만에 귀국, 모스크바에서 로얄필과 콘서트를 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존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기교와 음악성을 갖춘 아쉬케나지의탁월한 리듬감각은 비견될 사람이 없으며 다양한 음색과 풍부한 울림, 거기에 성숙한 인간적인 면모까지 반영,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성팬들로 매진행렬을 이루고 있다.
Franz Liszt, Feux-follets, Transcendental Etude No. 5 in B flat major, S. 139/5  Excerpt 

5. Wilhelm Backhaus(1884~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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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1891년부터 7년동안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알로이스 레켄도르프에게 사사한후 다시, 저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과 연주에 전념하고자 제자를 두지 않았던 달베도르프에게 찾아갔고, 달베도르프는 그의 자질을 보고 단번에 제자로 삼았으니, 그는 달베도르프의 유일한 제자였던 셈이다. 달베도르프의 가르침을 받은후 16세 되던 해 박하우스는 런던에서 최초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과 19세의 나이로 맨체스터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니키쉬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호평을 받은 그는 1905년 루빈스타인 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솔딜스하우젠 음악원,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로 일한적 있지만, 그의 시간의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 콘서트를 통한 연주활동이었다. 
'건반의 사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박하우스의 연주는 강인하면서도 완벽한 테크닉으로 큰 스케일의 연주를 특징으로 하는데, 그렇다고해서 극단적인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예리한 분석력과 작품에 대한 공감, 완벽한 균형감으로서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하였다. 그는 독일 음악에 강세를 보였는데 베토벤, 브람스, 슈만이 그의 장기였다. 특히 그는 베토벤연주의 권위자로 알려졌으며, 그의 베토벤 소나타는 일종의 교과서적인 음반으로 인정받고 있다.(그는 전 곡을 모노럴과 스테레오로 두 번 녹음했다.DECCA) 또한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한 빈필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음반도 명반으로 꼽는다.
Fryderyk Chopin, Etude for piano No. 14 in F minor, Op. 25/2, CT. 27 

6. Daniel Barenboim(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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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7살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 콘서트를 했고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과 아돌프 부쉬(Adolf Busch)에게 영향을 받았다. 1952년 바렌보임 가족은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1954년 여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ch)에게 지휘를 배웠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의 지휘 리허설에 참석하고 그의 앞에서 지휘를 했다. 1955년에는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에게서 화음과 작곡을 배웠고 1956년에는 런던에서, 1957년에는 뉴욕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와 협연했면서 바렌보임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1965년부터는 지휘자로 첫 인연을 가진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English Chamber Orchestra)와 약 10년간 함께 세계 순회 연주를 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갖고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이차크 펄만(Itzhak Perlman), 핑카스 주커만(Pinchas Zukerman) 등과 함께 자주 연주했으며 1968년에는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하였다. 1973년에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돈 죠바니'(Don Giovanni)로 오페라 지휘에 데뷔했고 1981년에는 독일 바이로이트에 처음 서기 시작하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파르지팔'(Parsifal),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 rnberg) 등을 지휘했다. 1977년에는 빈 필하모닉과도 미국, 파리, 런던에서 연주했다. 1991년에는 게오르그 솔티 경(Sir Georg Solti)의 뒤를 이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됐고 1992년에는 도이치 슈타츠오퍼 베를린(Deutsche Staatsoper Berlin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이 됐다.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며 자주 지휘을 하였다.
Franz Liszt, Sonetto del Petrarca No. 47 (Benedetto sia'l giorno; II), for piano (Années II/4), S. 161/4

7. Jorge Bolet(1914~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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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볼레트는 1914년 11월 15일, 큐바의 아바나에서 출생했다. 9살 때, 공개연주회를 햇고, 다음 해엔 아바나 필과 협연하는 등 피아노에 대단한 재능을 일직부터 보였다. 12세 때 장학금을 받고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했다. 학교 레슨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wsky)와 모리츠 로젠탈(Moritz Rosenthal)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하기도 했다.
1935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데뷔하고, 1937년엔 유진 올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협연하면서 미국에 데뷔하였다. 도한 이때부터 루돌프 제르킨에게 사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무렵에 '나움버그 상'과 '요제프 호프만 상'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제르킨의 조교로 커티스 음악원에서 일했고, 제2차대전 때는 미육군에 들어갔다가 전후엔 일본에 체류하기도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46년에 주일미육군 음악감독으로 있던 설리반의 오페레타 '미카도(Mikado)'의 일본초연을 지휘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다시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1968년엔 인디애나 대학교 음악학부의 교수로 취임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았을 때, 구스타브 말러는 "나의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볼레트 역시 바로 그러한 신조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볼레트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비록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존시에 인정받는 피아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볼레트는 19세기의 큰물결이었던 소위 '위대한 비루투오조(great virtuosos)'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그의 스승 고도프스키와 로젠탈이 리스트의 직계 제자이기 때문이다.
Anton Rubinstein, Etude for piano No. 2 in C major ("Staccato"), Op. 23/2 Excerpt

8. Alfred Brendel(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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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음반과 연주회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확고하게 다졌다. 소피아 데젤리크, 루도비카 폰 칸, 에두아르트 슈토이어만, 에트빈 피셔에게 사사했다. 1948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데뷔했으며 1949년 볼자노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그후 오스트리아 전역을 다니며 연주했으며 1962년 런던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고 1963년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연주여행을 가졌다. 주로 베토벤의 해석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리스트 연주가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슈베르트·하이든·모차르트 등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고 있다. 또한 슈베르트가 1822~28년에 작곡한 거의 잊혀져 있던 피아노 소품들을 대부분 혼자 힘으로 되찾아냈다. 음악에 대한 지적인 접근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음과 음색에 대한 감각적 처리에도 능숙하다. 브렌델은 저서 〈음악적 사고와 재고 Musical Thoughts and Afterthoughts〉(1976)에서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페루초 부조니, 에트빈 피셔에 대해 언급했다.
Franz Joseph Haydn, Keyboard Sonata in D major, H. 16/42 Finale [##_Jukebox|cfile21.uf@24518E385871D6B71CADFC.mp3|08. Haydn - Sonata In D Hob. XVI 42 (Finale)- Brendel Alfred|autoplay=0 visible=1|_##]

9. Mark Taimanov & Lyubov Br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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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보프 브룩 & 마르크 타이마노프 (Lyubov Bruk & Mark Taimanov)는 러시아 부부 듀오 피아니스트로써 둘다 1926년 우크라이나 kharkov에서 태어났고, Bruk은 1996년 St Petersburg에서 서거했습니다. 이둘은 12살때 레닌그라드 뮤직스쿨의 학생이었는데 그들의 선생이었던 Samari Savshinsky에 의해 듀오 피아니스트로 엮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듀오피아니스트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솔로 레퍼토리를 연습하면서, 보기드문 투 피아노 작품도 틈틈히 함께 하게 되었죠.  1941-1944 독일 침공이 있을시 정식 음악 교육을 마치고, 첫번재 공식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그후에 소비에트 연방안에서 바쁜 콘서트 일정을 보내고 동독, 헝가리, 체코 등에서 연주회를 열었으며 멜로디아에서는 음반도 남기게 되었습니다. 각자 솔로 레퍼토리와 듀오 레퍼토리를 고루 섞어 가며 연주회를 펼쳤죠. 1970년대 초에 와서는.. 자신의 일과 직업상 서로 갈라져서 따로 활동하게 됩니다

Anton  Stepanovich Arensky, Suite for 2 pianos No. 2 ("Silhouettes"), Op. 23 Coquette

10. Robert Casadesus(1899 ~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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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는 파리 태생이다. 삼촌 앙리는 부시 4중주단과 함께 20세기 초 최고의 앙상블로 불리는 카페 4중주단(Quatour Capet)의 비올라 주자였으며, 고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주로 가족들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며 고악기 연주의 재현을 위해 노력했던 뛰어난 음악가였다. 파리 음악원에서는 리스트의 제자며 프랑스 피아노 악파의 대가인 루이 디에메(Louis Diémer)에게 사사했는데, 그는 코르토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 때(1921년) 두 살 아래며 역시 디에메에게 배우던 가브리엘 로트(Gabrielle L'Hôte)와 결혼했다. 부인과는 이 후 50년 이상 앙상블을 이루며 해로한다.
그는 파리 근교 퐁텐블로(Fontainebleau)의 미국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이 음악원은 삼촌 프랑시 Francis 가 설립했다), 후에는 원장이 된다. 그는 이미 1936년 토스카니니 지휘 뉴욕 필의 협연으로 브람스 2번을 연주하여 절찬을 받았는데, 미국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다가 2차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무너지자 미국 음악원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제르킨과 부시처럼 미국 Columbia(현 Sony Classical)와 인연을 맺고, 2차 대전 종료 후 프랑스로 돌아가서도 Columbia 전속으로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녹음 및 콘서트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1971년까지 개최한 연주회 수는 무려 3000 이상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은 갑자기 다가왔다. 1972년 장남 쟝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수 개월 후 파리에서 세상을 떴다. 추측이지만, 아들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라고 해도 반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고 사이 좋은 아들이 40대 중반에 자기보다 먼저 죽었다면, 거의 절망하지 않을 부모가 도대체 있을까.
그의 예술은 명쾌와 세련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무엇을 들어 봐도 부분적인 과장이나 잡다한 군더더기와는 거리가 멀고, 코르토처럼 가끔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전혀 없다. 명쾌하고 밝으며 잘 공명되는 음향, 그리고 고전적이며 안정된 해석까지 갖췄으니 소위 '깔끔하게' 들릴 요소는 완벽하게 다 구비했다. 시원한 샘물이 찰찰 흐르는 느낌, 그것이 바로 그의 음악이다.
그의 레파토리는 라모 등 프랑스 바로크에서 바흐를 포함하여 브람스까지 독일 고전/낭만, 프랑크나 생상 등의 프랑스 낭만파인 스탠다드 목록과 함께 드뷔시와 라벨까지 프랑스 근대 음악들이 중심이다. 특히 좋은 평을 받는 것은 세련미와 맑음이 잘 어울리는 모차르트, 고전적이며 그의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 주는 라벨이다. 
Jean-Philippe Rameau, Le Rappel des oiseaux, for harpsichord in E minor

11. Shura Cherkassky(1909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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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로맨틱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분이다.
1911년 10월 7일 러시아의 오뎃사 출생.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피했다. 소년시절의 체르카스키는 비범한 천재였다.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서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게 사사했다. 11세 때 볼티모어에서 데뷔했고, 5년 뒤 오스트리아와 남아프리카에 연주여행 했다. 이후 유럽 연주 계획은 2차대전으로 지연되고 있다가 1945년에야 이뤄져 독일 팬들을 열광시켰고 이로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유명한 음악제에 초대되는가 하면 연주여행도 계속 됐다. 1991년엔 뉴욕 카네기 홀에서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에 나와 변하지 않은 노익장을 들려주기도 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그의 연주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의 레퍼토리는 특히 낭만파에서 많이 선택 됐는데 특히 러시아 작곡가들인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확연하게 차별되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명반으로는 쇼팽의 폴로네이즈 앨범, 리스트의 항가리 환상곡, 슈만과 브람스의 변주곡 앨범, 80회 생일 기념공연 실황 앨범 등이 있다.
미국 음악계에서 ‘피아노의 루지에로 리치’라고 불려질만큼 대단한 테크니시언이었다. 명료한 톤, 눈부신 기교의 소유자였지만, 그와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인 호로비츠에 비해서 체르카스키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까닭은 그가 마이너 레이블에서만 음반을 발표한데 있다고 여겨진다. 그의 음반들은 Nimbus, Pearl , Ivory 등 마이너 레이블에서 발표되었고, 그나마 그 수량도 얼마되지 않는다
Fryderyk Chopin, Mazurka for piano No. 23 in D major, Op. 33/2, CT.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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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klavier
    2008.06.12 04:53 신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근데 20세기 피아니스트에 리히터하고 루빈스타인이 빠져서 아쉽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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