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想像 2008. 6. 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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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곡가. 파르마현 부세토 부근 레론코레 출생. 교회에서 음악에 관한 기초지식을 습득하던 중 재능을 발견한 부세토음악원장 프로베지 등 경제적 지원자의 도움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1832년 밀라노음악원 입학에 실패한 뒤 스칼라극장의 음악가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36년 부세토의 산 바르톨로메오대성당 악장에 임명되었다.

34년 밀라노에서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을 작곡, 39년 스칼라극장에서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초연된 《하루 만의 임금님(가짜 스타니슬라오)》이 실패로 끝나 실의에 빠졌으나 스칼라극장 지배인 메레리의 후원으로 《나부코》을 작곡하였다. 42년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유대인들이 노래한 <가라, 생각이여, 황금의 날개를 타고>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 아래 있던 이탈리아의 조국통일운동 속에서 제 2 의 국가(國歌)가 되어 널리 불려졌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그는 오페라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다.

44년 베네치아 페니체극장의 의뢰로 작곡한 《에르나니》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을 돌며 신작을 발표했다. 47년 발표한 《맥베스》은 증오와 몽상이라는 인간감정의 적극적 표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이탈리아 오페라는 보다 극적인 통일성, 심리적 표현을 다루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작품 가운데 51∼53년에 걸쳐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 성격이 각기 다른 걸작을 발표했다.

《시칠리아섬의 만종(1855)》은 프랑스의 그랜드오페라 양식에 따른 작품으로 파리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59년 발표된 《가면무도회》는 나폴리의 산카를로극장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지만 나폴리왕국이 오페라화(化)를 인정하지 않아 이야기무대와 인물 이름을 변경해서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도전하려는 시대정세 속에서 《나부코》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61년 국회의 하원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명성이 높아진 그에게 여러 나라에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운명의 힘》은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황실오페라극장의, 《돈 카를로스》는 파리오페라극장의 의뢰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71년 초연된 《아이다》는 수에즈운하 개통을 축하하는 카이로의 오페라극장을 위한 작품이다. 16년 동안 오페라 작곡에서 손을 뗀 뒤 E.G.G. 보이토의 도움을 받아 옛 작품의 개정작업을 하고 수년에 걸쳐 여러 가지 수정을 더한 《오텔로》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는 노래와 관현악이 어우러진 표현이 한층 추구되고, 노래마다의 구분이나 아리아·레시터티브의 구분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희극적 성격이 강한 《팔스타프》를 마지막으로 극장을 위한 작곡활동을 중단하고, 이후에는 《성가 4편》 등의종교적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 속에서 19세기 전반의 벨 칸토(bel canto) 오페라시대의 유일한 개성적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는 구성상의 문제와 연기에 유의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작곡가로서 항상 유려한 선율성을 주장했으며,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 독립을 부르짖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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