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想像 2008. 6. 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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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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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곡가. 본 출생. 최성기의 고전파에서 초기낭만파에의 전환기에 56세의 생애를 보낸 베토벤은 고전파 음악양식을 최고 정상까지 높이는 동시에 19세기 음악가들의 우상적 존재가 되었으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애

그의 조부 루트비히는 플랑드르에서 이주한 본의 궁정악장이었고, 아버지 요한은 본의 궁정가수였으며, 어머니 마크달레나는 궁정요리장의 딸로서  미망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1770년 베토벤이 태어났다. 그의 세례일은 70년 12월 17일로 되어 있으나 명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플랑드르의 중후한 기질, 독일의 엄격한 논리, 라인지방의 희노애락이 심한 감정, 그리고 제 2 의 고향이 되는 빈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베토벤음악의 배경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 기초를 배웠고 7세 때 연주회에서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여 풍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년시절 본에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몇 사람의 음악가로부터 개인교수를 받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10세 때부터 베토벤을 가르친 C.G. 네페였다.

제 2 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그의 재능을 절찬한 네페는 J.S. 바흐와 C.P.E. 바흐의 작품을 가르쳤다. 11세 때 최초의 작품을 출판한 베토벤은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동하였다. 16세 때 그는 모차르트를 동경하여 빈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급병 소식을 듣고 본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의 죽음은 주벽이 심해진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들었고, 베토벤에게 집안 생계를 맡기는 결과가 되었다.

실의에 찬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브로이닝가(家)의 따뜻한 분위기였으며 그 집 딸 엘레오노라는 베토벤의 첫 애인이 된다. 그의 후원자가 되는 발트슈타인백작도 87년에 본으로 부임하여 물심양면으로 베토벤을 도와준다. 92년 본을 방문한 F.J. 하이든에게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가 되려고 21세 때 빈으로 떠난다. 92년 빈에 도착하여 하이든·J. 센크·J.G. 알브레히츠베르거 밑에서 먼저 작곡기법을 배우는 동시에 피아노의 명수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점차 높은 평판을 얻게 된다.

빈 생활 3년째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자작 피아노협주곡 제 2 번을 연주하여 데뷔하였고, 작곡가로서는 《피아노 3중주곡집》을 출판하였다. 96년에는 보헤미아와 독일에 연주여행을 하는 등, 연주·작곡 양면에서 순조롭게 성장하여 1800년에는 그 자신의 연주회를 빈에서 열고 교향곡 제 1 번을 초연하였다. 이듬해에는 J. 구이차르디와 사랑에 빠져 피아노소나타 《월광》을 작곡하였고, 27세 무렵부터 느꼈던 난청이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귓병으로 악화되자, 1802년에는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그러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계기로 교향곡 제 3 번 《영웅》, 교향곡 제 5 번 《운명》, 오페라 《피델리오》 등 수많은 걸작을 계속 작곡하게 되었다.

1808년에 베스트팔렌국왕이 카셀궁전에서 악장으로 초빙하자 좋은 경제적 조건 때문에 그는 카셀로 가려는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재능을 존경하는 루돌프대공을 비롯한 빈의 세 귀족들은 연금을 서로 출자하여 베토벤을 평생 오스트리아에 머물러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09년부터 12년까지의 시기에는 피아노협주곡 제 5 번 《황제》, 피아노 3중주곡 《대공》, 교향곡 제 7 번과 제 8 번 등 다채로운 작품을 작곡하였다. 13년부터 16년까지는 사랑편지 <내 불멸의 애인이여>의 상대방인 브렌타노부인과의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그의 자주적 작곡활동은 침체하였으나, 17년에는 《전쟁교향곡》과 오페라 《피델리오》의 상연이 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8년부터 청각을 거의 잃은 그는 필담(筆談)에 의해 생활해 가면서도 피아노 소나타 《하머클라비어》를 비롯해 후기의 걸작군을 창작해 갔다. 베토벤음악의 총결산인 교향곡 제 9 번 《합창》은 24년 5월 7일 빈의 쾰른트나투르극장에서 8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4명의 독창자, 약 100명의 합창에 의해 초연되었다.

26년 12월부터 간경변 때문에 수술을 되풀이했으나, 27년 3월 23일에는 죽음을 깨닫고 유서를 썼다. 3월 26일 그는 56세의 나이로 생애를 끝마쳤다.

음악

그의 작품은 양식변천에 따라 다음 4기로 구분한다. 그 자신이 작품번호를 붙인 빈 시절의 양식변천은 9곡의 교향곡, 32곡의 피아노소나타, 16곡의 현악 4 중주곡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교향곡에서는 홀수번호와 짝수번호의 작품이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처럼, 독일적 음악과 오스트리아적 음악이 혼재해 있는 것도 그의 음악의 특징이다. 그리고 WO라는 번호는 G.L. 킨스키와 A. 할름이 1955년에 《베토벤작품목록》을 편찬할 때 베토벤 자신의 작품번호가 붙어 있지 않은 곡에 붙인 번호이다.

(1) 본 시절(1782∼92)

본에서 접촉하고 배운 여러 가지 양식을 짙게 반영한 학습시절이다. 건반악기를 위한 3개의 선제후(選帝侯)소나타(W O47, 1783)는 C.P.E. 바흐와 만하임악파의 영향과 함께 그의 독자성도 나타나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의 찬미는 3개의 클라비어 4 중주곡(W O36, 1785)에 나타나 있다.

(2) 빈 초기(1793∼1802)

개인교수에 의한 대위법 학습으로 시작되는 이 시기는 고전파 기악양식을 습득·발전·실험함으로써 그의 독자적 양식이 차츰 선명하게 나타난 시절이다. 《피아노 3 중주곡집(작품1, 1794∼95)》과 《피아노 소나타집(작품2, 1793∼95)》에서 4악장 구성, 소나타형식의 확대, 스케르초 사용 등, 베토벤의 새로운 면이 나타나 있다. 《현악4중주곡집(작품18, 1798∼1800)》에서는 대위법적 수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그 밖에 교향곡 제 1 번과 제 2 번, 피아노소나타 《비창》, 피아노협주곡 제 1 번과 제 2 번이 이 시기에 속한다.

(3) 빈 중기(1803∼12)

그가 쌓아올린 극히 논리적 형식 속에서 감정의 흐름을 극적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양식에 의하여 이 시기에 걸작이 속출되었다. 교향곡 제 3 번 《영웅》부터 제 6 번 《전원》에 이르는 4곡의 교향곡, 《코리올란서곡》, 피아노협주곡 제 4 번, 바이올린협주곡, 《라주모프스키현악 4 중주곡집》, 오페라 《피델리오》 등이 1808년까지 탄생되었다. 1809년 이후, 구축적인 주제의 전개를 중심으로 한 양식에서, 피아노 3 중주곡 《대공(작품97, 1810∼11)》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율적 주제에 의한 서정적 양식으로 변해갔다. 한편 교향곡 제 7 번(작품92, 1811∼12)과 제 8 번(작품93, 1812)에서는 리듬이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4) 빈 후기(1813∼26)

작품의 침체기가 되는 1813년부터 16년까지의 시기는 가곡집 《멀리있는 애인에게(작품98, 1815∼16)》를 비롯하여 기악작품에서도 낭만파적 색채가 강해지는데, 17년에 착수한 피아노소나타 《하머클라비어(작품106, 1818년 완성)》를 출발점으로 다시 거대한 형식으로 되돌아가 후기양식의 정상으로 올라선다.

후기양식의 뚜렷한 특색은 푸가로 대표되는 대위법적 수법 및 변주기법을 중요시한 것이며, 시대를 초월한 다채로운 울림의 세계를 창조해갔다. 성악과 기악이 일체화된 《장엄미사곡》과 교향곡 제 9 번, 피아노소나타(작품106, 109, 110, 111) 4곡과 《디아벨리변주곡》, 현악 4 중주곡(작품127, 130, 131, 132, 135)의 5곡과 대(大)푸가는 바로크시대부터 최성기 고전파에 이르는 음악을 베토벤이 총결산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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