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想像 2008. 5. 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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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피아니스트·작곡가. 라이딩 출생. 남독일 출신인 부친 A. 리스트는 헝가리 명문귀족인 에스테르하지가(家)의 토지관리인으로서 첼로·피아노를 연주하고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던 음악애호가였다. 7세 때 부친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8세 때부터 공개연주회를 가져 신동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1820년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에서 가진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몇 명의 귀족들로부터 6년간 연 600굴덴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족과 함께 빈으로 옮겨 K.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A. 살리에리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의 재능을 간파한 체르니는 무보수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악보를 주고 생활도 원조했다.

22년 빈 음악계에 데뷔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다음해 4월의 연주회에서는 베토벤의 축복을 받았다. 9월 빈을 떠나 뮌헨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지면서 파리에 도착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지 못하고 F. 파에르에게 작곡을, A. 라이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24년 파리·런던 등지에서 독주회를 가져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랑의 성(Don Sanche, 1824∼25)》으로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았다.

16세 되던 해 부친을 잃고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므로 연주회 외에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그 중 피아노 제자인 프랑스 고관(高官)의 딸 카롤린과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카롤린의 부친으로 인하여 헤어진 뒤 실의에 빠져 연주활동도 중단하고 문학·종교서적에 심취하였다. 이것이 뒤에 작곡한 교향시의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30년의 7월혁명과 작곡가 베를리오즈·쇼팽, 시인 V. 위고·하이네·A.M.L. 라마르틴을 비롯한 문인·화가들과의 교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31년에는 바이올린의 명인 파가니니의 뛰어난 연주에 충격을 받고 <파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결심했다. 리스트가 새롭게 인기를 회복하여 파리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때 작가 G. 상드의 소개로 다구백작부인 마리를 알게 되었다.

35년 백작부인과 제네바에서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리스트는 제네바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피아노곡집 《여행자의 앨범(1835∼36)》 《반음계적 대갈롭(1838)》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超絶技巧) 연습곡(1838)》 등을 작곡했다. 39년까지 계속된 백작부인과의 생활에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둘째 딸 코지마는 뒤에 바그너의 아내가 되었다. 39년 빈에서의 연주여행이 대성공을 거두어 부다페스트에서는 개선장군과 같은 환영을 받았으며, 이후 유럽 각지를 돌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쳤다.

유명한 《헝가리 광시곡(1846∼85)》은 이 시기에 작곡을 시작했다. 47년 키예프에서 가진 자선연주회를 계기로 비트겐슈타인후작부인과 연애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연주보다 창작에 힘을 쏟으라는 후작부인의 권유에 따라 작곡 및 궁정악단 지휘자로서의 <바이마르시대>가 열렸다. 피아노곡집 《순례의 해-제 1 ·제 2 년(1837∼54)》 《초절기교연습곡집(1851)》, 교향시 《전주곡(Les Pr ludes, 1848)》 《타소, 비탄과 승리(1849)》 《죽음의 무도(1849)》 《피아노협주곡 제 2 번 A장조(1839)》 《피아노협주곡 제 1 번 E 장조(1849)》 《단테교향곡(1855∼56)》 《파우스트교향곡(1854∼57)》 등 대표작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고,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은 물론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와 슈베르트·슈만 등의 작품을 과감히 무대에 올려 연주했다.

또 H.G.F. 뷜로·C. 타우지히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곤경에 빠진 바그너와 베를리오즈를 지원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바이마르는 독일 예술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61년 후작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로마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작부인과 이별하였다. 그 후 리스트는 종교음악에 열중하여 오라토리오 《성 엘리자베스의 전설(1857∼62)》 《그리스도(1862∼67)》, 피아노곡 《2개의 전설(1863)》 등을 작곡했다. 한때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했으나 69년 바이마르로 돌아가 로마·부다페스트 등지에서 피아노곡 《먹구름(1881)》 《무조소곡(無調小曲, 1885)》 등을 작곡했다. 86년 딸 코지마를 만나고 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갔다가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연주의 기교를 확대시켰고 많은 선배 작곡가들과 같은 시대인들의 작품을 피아노연주용으로 편곡했다. 작곡가로서는 수많은 피아노곡 외에 표제음악(標題音樂)으로서 교향시를 완성시켰고, 만년에는 20세기 음악을 예고하는 무조의 작품을 썼다. 형식·화성·관현악법 등에서도 대담한 수법을 도입해 문학성과 낭만주의 및 웅대한 환상으로 음악의 여러 분야를 혁신했다고 평가된다. 지휘자·교육자로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 많은 신작과 묻혀 있던 작품을 발굴하고 젊은 음악가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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