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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 풍남문 [豊南門]

想像 2017. 10. 6.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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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읍성은 원래 4대문이 있었으나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1907년 풍남문만 남고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어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복원하였다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흔히 전주를 일컬어 ‘풍패향’, ‘풍패지향’이라고 한다. ‘풍’은 중국의 현의 이름이고 ‘패’는 군의 이름으로, 중국 진왕조 이후 천하를 재통일한 한나라의 건국 시조 유방이 ‘패군’ ‘풍현’ 출신이었던 까닭에, ‘풍패’는 건국 시조 또는 제왕의 고향을 지칭한다. 전주를 ‘풍패지향’에 비유한 것은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원지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조선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담아, 옛 전주읍성의 남문을 풍패의 남쪽이라는 뜻의 ‘풍남문’이라 이름짓고, 전주객사에는 ‘풍패지관’이란 현판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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